파동방정식 발표 후, 슈뢰딩거의 명성은 점점 높아져 가게 된다.
1927년 베를린 대학교의 이론 물리학의 대가 막스 플랑크가 은퇴함으로
(베를린 대학교: 1810년 설립, 베를린 대학교→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명칭변경)
그 후계자로 당시 유명한 물리학자 조머펠트 (Arnold Sommerfeld: 1868~1951, 물리학자, 노벨상 후보로만 84번...못받음)
그리고, 슈뢰딩거가 최종 3인 후보로 지명되게 되는데...
첫번째 후보 조머펠트는 자신이 재직중인 뮌헨을 떠나기를 거절,
다음 후보인 슈뢰딩거가 제안을 받게되었다.
하지만 슈뢰딩거도 취리히를 떠나는 결정을 하기 쉽지 않었다
취리히대학 물리학과 학생들은 탄원서를 내고 햇불행렬로 슈뢰딩거가 남기 희망하는 마음을 보여주었었다
슈뢰딩거는 취리히 학생들이 자신이 떠나지 말라고 한목소리를 내는것에 감동 받았지만
막스 플랭크의 호소에 의해 1927년 10월 1일, 베를린 대학으로 옮기는 동시에 독일 국적자가 되게된다
그리고 자신과 마음이 맞는 과학적, 철학적 견해가 비슷한 막스 플랑크와 친밀한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열심히, 잘 지내던 슈뢰딩거는, 나치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가고...
당시 많은 과학자들과 마찬가자로 나치즘을 혐오하여 결국 독일을 떠나게된다
다행히 딩거의 친분이 있는 영국의 물리학자 린데만(Frederick Alexander Lindemann, 1886~1957)이 다리를 놔줬다
그는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여서 딩거가 옥스포드(Magdalen College)에 자리를 마련할 수 있게 설득해줬다.
<참고>역사상 최고의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과학자는 누구였을까? 바로 프레드릭 린데만이다.
그는 처칠의 과학고문으로 활약, 2차대전 당시 독일의 민간지역을 폭격하는 "모랄 폭격" 전략으로 수많은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정책을 하도록 조언했다.
1933년 11월 4일 딩거는 옥스포드에서 연구실적을 올리기 위해 헌신 할 것을 약속하고 갔다.
딩거의 사생활에 자세한 내막을 알게되고 나서 린데만은 엄청 화를내고 쫒아 버리라고 했다.
1933년 새로운 형태의 원자 이론을 발견한 공로로
슈뢰딩거는 폴 디랙(Pam Dirac)과 함께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그는 노벨상의 영예를 안었지만, 향후 이것으로 인하여 전세계의 물리학자, 학생들을 괴롭히게 된다.
100년 가까이 괴롭혀 왔고, 앞으로도 그럴것이다.
그후, 1934년
세계 최고 기초과학 연구기관인 미국 프린스턴의 고등 연구소(IAS: The Institute for Advanced Study)에서
초청강연을 위해 머물고 있는동안, 그곳으로 부터 영구직을 제안 받게 된다.
IAS는 당시 과학자들이 연구하기 좋은, 과학자들 사이에서 신의 연구소로 불리우던 곳이다.
학자들은 연구비를 받기 위한 일을 하지 않어도 되며, 계약, 실적압박과 상관없이 학자들의 자율에 맡겨져서
원천 지식의 탐구가 가능한 곳이다.
하지만, 슈뢰딩거는 거절...!!
이유는 사후에 배우자에게 지급되는 연금이 적어서 였다
물리학계 거장들의 양자역학에 대한 의견 대립은 깊어지고
슈뢰딩거는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 연합의 코펜하겐 해석(Copenhagen interpretation)에 대항하여
(언젠가는 위대한 과학자인 3분에 대해서도 다뤄보죠...)
이를 반박하기 위해 고양이를 예시로 든 의견을 강하게 낸다.
1935년 양자역학의 비판을 위한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등장하게 된다
상자에 가둔 고양이를 예시로 설명하였는데...
(번외편에서 다룰예정)
보어, 하이젠베르크, 보른이 해석한 양자역학 해석에 따르면
상자안에 들어가 있는 고양이가,
상자를 열어야 살게될지 죽게될지 정해진다면
그 고양이는 반은 죽어있고 반은 살아있느냐는
말도 안되는 논리라고 비판을 한것이다
마치 강아지가 서있으면서, 걷고 있다는 것이 가능하냐? 라는 ...
그리고, 다시 영국
한편 옥스포드는 1936년도에 임명을 2년 추가하자 제안했으나, 슈뢰딩거는 이를 거절,
그는 그라츠 대학교 (University of Graz)의 제의를 받고 고국 오스트리아로 컴백하게된다
슈뢰딩거의 고국 오스트리아에 대한 갈망이 그의 신중한 결정을 하지 못하게 만들것일까???
그의 고생스러운 인생이 또다시 시작된다.
1936년에는 오스트리아로 컴백하여, 그라츠 대학교 (University of Graz) 물리학 교수, 명예교수직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37년 독일 물리학회 막스 플랭크 메달을 수상하였다.
딩거는 자신의 모교인 비엔나 대학으로 부터 교수직 제안이 오기를 오매불망 기다리려 했으나..
그런일은 생기지 않었다.
그리고, 독일은 오스트리아를 서서히 장악하기 시작하고, 나찌의 영향력이 미치기 시작한다.
슈뢰딩거와 친분을 유지하던 그라츠대학교의 나치 학장은 슈뢰딩거를 걱정하여 무사히 지내기 바랬고,
슈뢰딩거에게 나치에 회계하는 편지를 쓰도록 권유한다.(강제가 아니였다)
나치는 이편지를 신문으로 널리 알렸다.
슈뢰딩거는 강제로 쓴건 아니지만, 후에 이 회계를 평생 후회했다
한편, 슈뢰딩거는 나치즘을 반대하는 절친한 아인슈타인과 멀어질까봐 걱정하였고,
아인슈타인에게 진심은 다르며,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던 자신이 엄청난 이중성을 보일 수 밖에 없었다고 편지로 자신의 마음을 전달했다.
이 일로 인해서 그와 멀어졌다고 알려져있으나, 정확히는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주고 받는 사이로
둘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었던 것으로 보인다
슈뢰딩거는 나치 회계 이후에 독일에서 잘지냈다.
막스플랭크의 80번째 생일축하에도 초대받어 참석하며 독일 과학자들과의 유대를 다졌다.
하지만...
1938년 4월 10일 독일은 오스트리아 독일의 일부로 병합하게 되는데...
나치는 1933년 베를린에서 등을 돌려 도망친 슈뢰딩거에 대한 모욕을 잊지않고 보복하였다.
반나치즘 성향의 슈뢰딩거는 나치에게 탄압을 당하게된다.
나치는 슈뢰딩거를 탄압하여
1938년 8월 26일 그라츠대학교에서 쫒겨나게된다
위협을 느낀 딩거는 돈은 커녕 소지품도 챙길 시간 없이 이탈리아로 서둘러 떠나게 된다.
다행히 이탈리아의 역에서 엔리코 페르미를 만나게되어, 약간의 돈을 빌려서 입에 풀칠 할 수 있게된다
(페르미의 아내가 유대인이여서 무솔리니 치하에서 압박을 받아서 스웨덴에서 노벨상과 상금 수령후 바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더 안전한 곳을 찾아 가야 한 슈뢰딩거는 당시 아일랜드 총리인 영향력있는 정치가 발레라(Eamon De Valera)에게 편지를 써서 도움을 청했다
발레라는 기꺼이 슈뢰딩거에게 전폭적인 도움을 준다.
그리고 발레라는 훗날 아일랜드의 3대 대통령으로 취임한다.
뒤돌아 보면, 프린스턴의 제안을 받아들여 미국으로 갔다면
슈뢰딩거는 이런 생고생을 하지 않었을것이다.
1939년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어 도망쳐서 벨기에 겐트 대학 (Rijksuniversiteit te Gent)에서 임시로 교수직을 지냈으며
1940년 부터 1955년까지 새로 설립된 아일랜드의 더블린 고등연구소의 (Dublin Institute for advanced studies)의 이론물리학부 학장으로 재직하게 된다.
슈뢰딩거는 아일랜드에서 1955년까지 오랜기간동안 제2의 나라로 지내게 된다.
여기서도, 원부인과 함께 혼외자녀까지 출산한 여자도 함께 가겠다고 협상했었다.
발레라가 잘 받아 준것으로 보인다.
아일랜드에서 자리를 잡자마자, 그는 또 다시 시작했다!
확인된것만 해도 2명의 유부녀와 자녀를 낳았다
이곳에서 (은근히 두번째 노벨상에 대한기대감을 갖은것으로 보여짐) 전자기 이론과 상대성 이론등을 연구하여 통일장 이론에 대해 발표 하였으나,
아인슈타인은 혹평을 받는등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는데...
슈뢰딩거는 양자역학을 깊게 연구하지 않고 다른쪽으로 관심을 돌리게된다
1944년 "생명이란 무엇인가?: What is life?"를 출판하게된다.
제목에서도 느껴지지만 이책은 물리학, 양자역학에 관한 내용이 아닌, 생물학에 대한 논의가 담겨 있는것으로
제임스 왓슨(James Dewey Watson),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등 생물학자들 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으며
후에 왓슨과 크릭은 DNA이중나선 구조를 밝혀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한다.
1948년 아일랜드 국적을 취득하게된다.
하지만 고국 마음을 버리지 못한 그는 오스트리아 국적은 계속유지한다
1955년 은퇴할때까지 더블린에서 재직하다가
그리고1956년 드디어 비엔나로 돌아오게 된다
1956년에 오스트리아 비엔나 대학교 명예교수를 받게된다.(그토록 바라던...)
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1961년 1월4일 슈뢰딩거는 지병인 결핵으로 73세의 나이로 비엔나에서 생을 마감했다
교황청 과학 아카데미(Pontifical Academy of Science)의멤버로 활약했던 덕분에 그는 신자가 아니였지만, 카톨릭 묘지로 갈 수 있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 애니는 1965년 10월 3일에 슈뢰딩거와 함께 하게되었다.
그의 묘비에는 파동방정식이 새겨져 있다.
슈뢰딩거... 안녕...... 위대한 과학자여...
슈뢰딩거의 기념비
양자역학의 아버지로 불릴만큼 큰 기여를 한 슈뢰딩거를 기리기위해 달의 큰 분화구중 하나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1983~1997 오스트리아 1000 실링 지페에 그의 초상화가 담겼다
옥스포드에는 슈뢰딩거의 이름을 붙인 Oxford Science Park 가있다.
베를린(홈볼츠) 대학교에는 그의 이름을 붙인 건물이 있음